고샅고샅

紹修書院 사적 제55호

나래아빠 2013. 8. 30. 16:48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제55호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조선 중종37년(1542)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지역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인 회헌 안향의 위패를 모신 사묘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명종임금께 건의하여

서적,토지,노비 등과 함께"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 받았다.

소수서원은 신라시대때 창건된 숙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졌다.이에대해서는 불교에서

유교로 넘어와 선비정신을 이어가는 유불문화의 융합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나

숭유억불사상의 영향이라는  견해도있다.

서원입구에서 학자수라 불리는 의젓한 전송군락을 따라가면 맑고 맑은 죽계수를 만난다.

시냇가에는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와 풍류를 즐긴다는 취한대와 敬자 바위가 있다.

경렴정과지도문을 지나 만나는 서원경내는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있다.

보통은 전당후묘,즉 앞에는 공부하는공간,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 배치가 일반적인데,

소수서원은 동쪽이 강학공간,서쪽이 제향공간이다.서쪽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을 따른것이다.

 

 

영주 숙수사지당간지주

 

보물 제59호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8

당간지주는 사찰입구에 새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있을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죽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한다. 

이 당간은 소수서원 입구 소나무숲에 남아있는것으로,

서원내에 아직도 당시 숙수사의 여러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것으로 보아

지금의 위치가 원위치로 보인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전기에 창건된 사찰로,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폐사된 듯하다.

원래는 지주와 당간을 받치던 바닥돌이 있었을 듯 하나

현재는 지주 양쪽으로 길고 큰 돌 한장씩이 놓여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하며 돌을 다듬은 솜씨도 새련되어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翠寒臺

취한대는 자연을 벗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곳이다.

퇴계 이황이 터를 닦고 취한대라 이름을 붙였다.이는 옛시(송취한계)에서 따온 것으로

푸른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이다.

 

 

 

敬자바위

주세붕은 敬이라는 글자 한자를 바위에 새겨 남겼다.

敬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 한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안향을 공경하고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있다.

敬자 위의 백운동(白雲洞) 은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이다.

 

 

 

 

 

 

 

 

늘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관세대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돌이다.

 

 

庭燎臺

 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로 윗부분 석재위에 관솔을 피워 정원을 밝혔다.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것도 특이한 일로

안향초상(국보111호)과 주세붕초상(보물717호)등 보물급 영정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1975년에 특별히 지어진 건물이다.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일영대(日影臺)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있다.

맑은날,윗부분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자연석 주춧돌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고샅고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오실지(佳五室池)  (0) 2013.09.11
영주 선비촌  (0) 2013.09.03
지림사 국보제201호 마애여래좌상  (0) 2013.08.29
청량산 청량사  (0) 2013.08.22
청량사 삼각우송  (0) 2013.08.22